자료실∙칼럼
칼럼(함께하는 사랑방)

한국 노사관계의 패러다임 전환

작성일
2024-07-31
조회수
265


노광표
공공상생연대기금 이사장


코로나19 위기 이후의 세상은 장밋빛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흐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 진행 중이고, 미증유의 위기 극복 처방전은 전 세계를 인플레이션과 부채 증가로 허덕이게 했다. 우리나라도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이라는 낯선 환경이 서민들을 꼼짝달싹 못 하게 하고 있다. 일시적 위기라면 ‘시간이 약’이겠지만, 위기는 구조적이고 복합적이다. 경제 불황의 장기화와 함께 새로운 도전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저출생과 고령화, 지방소멸, 불평등 심화와 노동 양극화, 인공지능(AI)혁명과 기술 패권, 기후 위기 등이 그것이다.  


뜻을 모아도 위기 극복이 만만치 않은데 사회·정치세력간 갈등과 대립은 더 커지는 양상이다. 전경련(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갈등지수는 55.1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국가 가운데 멕시코(69점)와 이스라엘(56.5점)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고, 정부의 갈등관리 지수는 27위로 낮았다. 또한 한국리서치(2023년 5월) 집단별 갈등조사를 보면 여당과 야당의 갈등이 94%로 가장 높았고, 진보와 보수(92%), 부유층과 서민층·기업가와 노동자(88%), 정규직과 비정규직·기성세대와 젊은세대(84%)의 갈등이 크다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사회 집단 간 갈등이 한층 더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 사회 갈등 요인인 노사관계를 보자. 우리나라는 산업화의 오랜 역사에 비해 집단적 노사관계의 역사는 일천하다. 산업화의 시대였던 1960년부터 80년대 중반까지 노동조합은 이념적 배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과 연이어 터져 나온 789월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노동조합은 마침내 사회적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노동조합으로 뭉친 노동자들은 ‘선(先)성장 후(後)분배’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뿌리치고 ‘노동자도 인간’임을 선언하였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1988년에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되고, 장시간 노동도 시나브로 축소되었다. 1990년에 2,677시간이었던 연간노동시간은 2023년 1,874시간으로 단축되었다. 하지만 수십 년간 억눌렸던 노동자의 거센 요구와 저항은 극심한 노사갈등을 동반하였다. 또한 사용자들의 노조 불인정과 배제 전략은 노사갈등에 기름을 끼얹는 행위였다. 결과적으로 1987년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노사관계는 갈등과 대립의 적대적인 관계였다.


우리의 노사관계를 참여와 협력의 공생적 관계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의 노사관계가 효율성도 낮고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유럽 국가와 달리 기업별 노동체제를 특징으로 한다. 노동조합도 기업 단위로 만들고, 단체교섭도 기업 차원에서 진행하는 것이 기업별 노사관계이다. 기업별 노사관계는 원하든 원치 않던 전체 노동자의 이익이 아닌 특정 기업 종사자들의 배타적 이익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불 능력과 고용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는 잘 작동할 수 있으나 영세중소기업,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는 기능적 친화력을 갖지 못한다. 우리나라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노조조직률은 각각 36.9%와 70%인 반면 100인 이하 영세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조직률은 1.3%를 넘지 못하고 있다. 현 노사관계의 핵심 문제인 ‘노동의 양극화’는 상당 부분 기업별체제의 결과물이다. 


노사관계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서는 부분적인 땜질식 처방이 아닌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먼저, 기업별 노사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87년 노동체제’를 혁파해야 한다. 기업별체제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는 노동자의 연대도 노동개혁도 연목구어(緣木求魚)이다. 노동개혁의 화두인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해결을 위해 정부는 임금체계를 직무급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기업 단위의 임금체계 개편은 노동시장 양극화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 어렵더라도 산업과 업종단위로 노조를 재편하고 산별 교섭구조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둘째, 노사의 공동 이익 추구이다. 참여 협력적 관계가 될 때 사회관계의 구도는 ‘대립적, 도구적 교환’의 관계에서 ‘협력적, 유기적 교환’의 구도로 전환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서로의 분배 몫이나 개인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약’ 관계로부터 더 큰 장기적 이익을 목표로 서로의 행위를 조율하고, 유기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산적 관계를 발전시키는 ‘협약’관계로 발전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협약적 질서가 만들어질 때 ‘저신뢰’에 기초한 분배 게임은 ‘고신뢰’에 기초한 생산적 노사관계로 바뀔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에 대한 능동적 대응이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그 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국내적으로 저출생과 고령화, 사회 불평등 및 노동 양극화 심화라는 도전과 함께 세계적으로는 인공지능 혁명과 기후 위기에 맞닥뜨려 있다. 다가오는 위기 상황은 남 탓하며 공방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노사 상생과 미래를 위한 공동 대응은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 조건일 뿐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그람시(Gramsci)는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노사관계는 다양한 위기 징후를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노사관계 리더들의 현명한 판단과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안내 메시지

안내 메시지

   취소

해당 서비스는 로그인을 진행해야 사용 가능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