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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다시 쓰는 ‘선결제 연대’…누군가 미리 낸 병원비로 ‘노동자 아픔’ 나눈다

작성일
2026-05-18
조회수
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경제적으로 퍽퍽했던 시기, 이탈리아 나폴리 사람들은 카페를 찾아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고 두잔 값을 지불했다. 다음에 오는 손님 누군가는 값을 치르지 않고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실 수 있었다. 미리 결제해둔 커피 한잔은 어려운 시기 고통을 나누는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나폴리의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선결제 커피)’ 전통은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윤석열 탄핵 촉구 시위가 한창일 때 서울 여의도 국회 근처 카페와 식당에서는 커피와 김밥, 샌드위치를 미리 결제해둔 이들이 있었다.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같은 달 21일 농민들이 트랙터를 타고 행진하다 남태령에서 경찰 차벽에 막혔을 때, 차가운 도로 위에서 밤샘 시위가 이어졌다. 핫팩, 빵, 커피, 여성용품 등 선결제된 물품들이 시위대에 배달됐다.


누군지 알 수 없으나 같은 처지, 같은 마음의 이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선결제 방식의 연대가 사회변화를 만든다. 남태령 시위에서의 연대는 아스팔트를 넘어 노동자를 위한 병원인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기금 모금으로 이어졌다. 그해 12월 22~25일, 단 나흘 만에 10억원 넘는 기부금이 모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 병원이 설립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민들의 병원비 선결제 기부가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 병원 짓고, 병원비 선결제까지 이어진 마음


서울 중랑구에 있는 공익형 민간병원인 녹색병원이 건립 추진 중인 전태일의료센터(지상 5층·지하 3층·34병상 규모)는 노동자 전담 병동을 운영하고, 과로사 대표 질환인 뇌심혈관계 질환 치료를 위한 필수 의료 장비와 노동자 건강 연구·조사 기능을 갖춘 ‘노동자를 위한 병원’으로 건립될 예정이다. 오는 2029년 개원을 목표로 최근 건물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이 병원은 시민의 힘으로 지어지고 있다. 건립에 필요한 기금 190억원 중 59억여원(4월 기준)의 기부금(2만7899명 참여)이 모였다. 남태령 시위 직후 폭발적으로 기부액이 늘었는데, 지난해 6월 1차 목표액(50억원)을 달성했을 때 기부액의 70%가 남태령 시위의 주축이었던 20~30대 여성들이 낸 기부금이었다고 한다.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위원회는 병원 건립 이후 아픈 노동자들이 병원 문턱을 보다 쉽게 넘을 수 있게 하려고 지난 3월 24일부터 병원비 선결제 캠페인 ‘일, 낸다’를 진행하고 있다. “아픈 동료를 위해 나의 ‘하루(日)’를 내어준다”, “가장 작은 ‘하나(1)’의 손길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 “전태일의 정신이자 일터의 ‘노동(일)’을 존중하는 태도”, “시민들이 힘을 모아 ‘일’(사건)을 낸다” 등 4가지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시민 참여자가 2만1000원(녹색병원 기준·외래 포함 전체 환자 1인 1일 평균 병원비)을 월 정기 후원하는 방식이다. 캠페인 7주차 5월 13일 현재 총 244명이 참여(3186만9988원)해 노동자 1518명이 하루씩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비가 확보됐다.


임상혁 녹색병원장은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기금을 모을 때 남태령 시위에서의 연대가 큰 힘이 됐다. ‘일, 낸다’ 캠페인은 남태령 시위에서 눈에 띄었던 선결제 연대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단순히 ‘기부’라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연대’라는 것이 이 캠페인의 두드러진 취지”라고 했다. “우리는 모두 노동을 하고, 그 노동은 모두 연결돼 있습니다.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습니다. 모든 활동은, 병원만 봐도 청소노동자를 비롯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의 노동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2024년 12월 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들이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 인근에서 경찰 차벽에 막혔다가 ‘남태령 시위’ 끝에 경찰 차벽 해제로 다음 날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행진하고 있다. 남태령 시위 참가자들이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기금 기부에 동참하면서 기부액이 크게 늘었다. 권도현 기자

2024년 12월 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농민들이 몰고 온 트랙터들이 서울 서초구 남태령역 인근에서 경찰 차벽에 막혔다가 ‘남태령 시위’ 끝에 경찰 차벽 해제로 다음 날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행진하고 있다. 남태령 시위 참가자들이 전태일의료센터 건립 기금 기부에 동참하면서 기부액이 크게 늘었다. 권도현 기자


녹색병원을 찾는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볼 때 한국사회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말을 실감한다고 임 원장은 말했다. 임 원장은 “녹색병원이 있는 중랑구 면목동에는 봉제 노동자가 많이 사는데, 이들은 근로계약을 맺고 4대 보험을 보장받고 월급을 받는 방식이 아니라 ‘셔츠 1장당 1000원’ 이렇게 노동의 대가를 받는다”며 “마치 자영업자처럼 돼 있는데, 이런 특수고용 노동자가 한국에 850만명이라고 한다”고 했다. 이어 “특수고용,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들은 소득은 굉장히 낮고 하루 일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게 되기도 해서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게 되고, 그러다 진짜 건강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가면 그땐 일을 할 수 없는 몸이 돼버린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의료비 지원했더니 일터·일상 복귀율 올라


3년째 학교 급식 조리사로 일하는 A씨(48)는 밤에 잘 때 손이 저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손이 퉁퉁 부어 칼질을 못 할 정도로 통증을 느꼈다. 동네 병원에서 손목터널증후군이 의심돼 수술이 필요할 수 있다는 소견을 듣고 녹색병원을 찾았다. 정밀검사비와 입원·수술비, 외래진료비 등 병원비(환자 본인부담금)가 400만원이 넘었다. 자녀를 홀로 부양하는 A씨는 치료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B씨(38)는 물류창고에서 일하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후 실업급여를 받던 중 부족한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간간이 배달 라이더로 일했다. 통풍 증상이 심해져 녹색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검사 결과 뇌경색 진단을 받았다. 일주일가량 입원해 치료를 받고 이후엔 집중재활치료를 받았다. 신용불량 상태인 B씨도 500만원에 달하는 의료비가 큰 부담이었다. 퇴원 후 생계를 꾸리는 일도 막막했다.


몽골 국적의 C씨(40)는 한국에서 이삿짐센터에서 일하다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 증상이 심해져 병원을 찾았다. 검사 결과 신장병, 급성 폐부종 진단을 받았다. 즉각적인 혈액 투석이 이뤄지지 않으면 생명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위중한 상태였다. 녹색병원에서 약 2주간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았다. 미등록이주노동자인 C씨는 위급한 상태는 벗어났지만 추가 치료가 필요했다. 건강보험을 적용받지 못해 장기 입원은 어려운 실정이었다.


녹색병원은 금융산업공익재단과 손잡고 2021년부터 ‘취약계층 노동자 의료비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 8월까지 1372명이 지원을 받았고, 2024년부터는 미등록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A씨는 이 사업으로 의료비를 지원받아 손목 수술을 받았고 물리치료를 병행하며 일터로 복귀했다. B씨 역시 의료비 상당 부분을 지원받았으며, 녹색병원 자체 사업인 ‘상병수당 지원사업’을 통해 100만원의 온누리상품권을 받아 생계유지에 급한 불을 껐다. C씨는 이 사업과 보건복지부의 ‘외국인 등 의료비 지원사업’을 연계해 치료비를 지원받았으며, 몽골로 돌아가 일상을 보내고 있다.


녹색병원이 2024년 1월부터 2026년 2월까지 의료비 지원을 받은 노동자 449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A·B·C씨의 사례처럼 취약계층 노동자에게 의료비 지원이 된다면 건강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일터와 일상으로 복귀율도 올라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업 지원 대상 환자들은 평균 월소득 대비 67%를 병원비로 지출할 상황이었으나, 의료비 지원 후 그 비중이 3.9%로 떨어졌다. 또 지원 대상자의 86.2%는 호전 후 일상으로 복귀했다. 특히 73.3%가 원직장으로 복귀했는데,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을 받은 노동자의 치료 이후 원직장 복귀율 41.7%(2024년 산업요양종결자 경제활동 실태조사 보고서)를 웃도는 수치다.


윤간우 녹색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과장은 “녹색병원 사회복지팀과 노조·시민단체들에서 환자를 발굴해서 즉각적이고 충분한 지원이 이뤄졌기 때문에 공적 기관이 지원할 때보다 소득 보전 효과를 냈다”며 “산재 보험만 해도 당사자가 신청한 후 급여를 받기까지 여러 절차를 거치다 보면 시간이 지체되는데, 취약계층에게는 치료가 지연될수록 생계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이어 “환자가 치료를 결정하거나 재활에 임할 때 병원 사회복지팀, 노조·시민단체의 심리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일상·일터 복귀에 동기부여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건강보험 등 공적 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이나, 또 제도망 안에 있어도 취약계층은 병원비가 부담스럽다”며 “민간 의료기관에서 환자의 재정 상태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는 의료행위를 하기는 쉽지 않다. 근로복지공단 소속 병원이나 공공병원, 또 민간 병원의 공익형 의료지원 사업 등에 국가 재정 지원, 기부 제도가 활성화돼 공백을 메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내 일이 될 수도…더 도울 수 있었으면”


‘병원비 선결제 기금’은 전태일의료센터에서 이 같은 취약계층 노동자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 이들의 적기 치료 및 일상과 일터 복귀를 돕는 데 쓰일 예정이다. 전태일의료센터의 연간 운영 비용은 8억8200만원(건립 부대비용·인건비 등 녹색병원 자체 지출 제외)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월 2만1000원 정기 후원자 3500명이 모이면 이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 이는 연간 4만2000명 노동자가 하루씩 치료받을 수 있는 금액이자, 34개 병상에 입원환자가 있는 병실에 365일 불을 켜둘 수 있는 금액이다.


1호 기부자인 배미록씨는 비영리단체 소식을 전하는 단체 채팅방에서 ‘일, 낸다’ 캠페인 소식을 접하고 후원을 결정했다. 그는 “미리 커피값을 계산하는 ‘서스펜디드 커피’ 운동에 공감이 됐다”며 “개인적으로 5개 기관에 후원하고 있는데 다른 곳은 대상자가 멀게 느껴졌다면 이 병원비 선결제는 나랑 가까운 사람, 이웃에게 선결제로 밥 한끼 사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사로 일하고 있는 배씨는 “아프면 각자가 책임지는 게 아니라 같이 책임지는 구조였으면 좋겠다”면서 “취약계층 노동자 의료비 지원사업도 시민들이나 병원이 나서서 하는 것에서 나아가, 정부나 서울시 등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법인 기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제이원더는 EBS <세계테마기행>, E채널 <용감한 형사들> 등을 제작한 콘텐츠 제작사로, 법인 명의 후원계좌 10개를 만들었다. 남택진 제이원더 대표는 “개인적으로는 첫 직장에서 노동자 다큐를 제작하던 선배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녹색병원에서 일하는 지인과 후배가 있어 이번 캠페인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고 했다. 남 대표는 “나도 프리랜서 PD로 오래 활동했는데, 그때 소득이 적고 4대 보험 가입되지 않는 취약계층 노동자였기 때문에 그분들이 병원에 입원하게 됐을 때 얼마나 힘들지 예상이 된다”며 “진짜로 가까이 옆에 있는 분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서 후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농민들이 만든 쌀밥과 채소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태령 시위에서 30대 참가자가 했던 말이다. “새벽을 여는 환경미화원의 밤이 있기에 우리의 출근길이 쾌적하고, 빗속을 뚫는 배달원의 위험이 있기에 우리의 식탁이 따뜻합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노동에 빚지며 살고 있습니다.” ‘일, 낸다’ 캠페인 홈페이지에 쓰여 있는 말이다. 커피 한잔, 하루 병원비가 각자도생의 시대에, 서로 연결돼 있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대단하지 않아서” 인터뷰도 조심스러웠던 기부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돕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인식의 문제잖아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각박한 세상인데, 내가 먼저 도와주면 도와주는 세상이 되잖아요. 내가 손 내밀어 도와주면 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라고 믿고 살았으면 좋겠어요.”(배미록씨)


“우리 사회가 좋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 노동자들을 위해서 어떤 힘이 돼줄 수 있는 역할을, 개인들도 하면 좋지만 법인이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도 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내년에는 더 많이 보태도록 하겠습니다(웃음).”(남택진 대표)


출처 : 희망을 다시 쓰는 ‘선결제 연대’…누군가 미리 낸 병원비로 ‘노동자 아픔’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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