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형 자선(Entrepreneurial Philanthropy)’의 시대
- 작성일
- 202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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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호 현대차 정몽구재단 사무총장
바야흐로 복합 위기의 시대다. 인공지능의 폭발적 진화, 기후 변화, 심화되는 불평등과 저성장의 늪은 이제 개별 국가나 단일 기업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 되었다. 이러한 대전환의 시기,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축으로서 공익재단과 비영리 조직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러나 과연 현재의 전통적이고 시혜적 복지 모델만으로 이 거대한 파도에 맞설 인재와 조직을 키워내고,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까?
과거의 공익 사업은 사회적 결핍을 메워주는 ‘지원 중심의 자선(Charity)’이었다. 훌륭한 인재를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하거나, 소외된 이웃에게 일회성 예산을 배분하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역할이었다. 이제 자선은 단순한 후원자(Donor)의 껍질을 깨고, 자본과 인재를 결합해 새로운 사회혁신 생태계를 창조하는 ‘기업가형 자선’으로 진화해야 한다. 즉, 기업가형 자선은 단순히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문제를 정의하고, 혁신을 제도화하며, 시장의 법칙을 바꾸는 ‘시스템 빌더(System Builder)’의 역할이다.
기업가형 자선의 가장 큰 특징은 자원을 배분하는 철학의 전환에 있다. 기업가형 자선은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시혜적 프레임을 거부하고, ‘세상을 바꿀 잠재력에 투자한다’는 벤처 스튜디오(사관학교/기획사)의 해법을 채택한다. 현대차 정몽구 재단의 창업지원 사업을 예로 들어보면, 뛰어난 아이디어와 역량을 가진 창업가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초기 창업가들은 자금부족 뿐만 아니라 법률, 회계, 인사조직, 브랜딩이라는 거대한 ‘제도의 벽’에 부딪힌다. 재단은 단순히 창업가에게 자금만 지원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창업가들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력한 ‘제도적 쿠션과 적극적 개입’을 제공한다. 재단과 창업가가 위험을 공유하며, 아이디어 단계부터 시장 안착까지 동반 성장하는 공동 창조(Co-creation)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일회성 지원(Support)를 영속적인 관계(Relationship)로 전환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고 성장한 창업가들이 다시 재단의 시니어 파트너나 창업 멘토로 돌아와 후배들을 이끄는 ‘선순환 플라이휠(Flywheel)’이 구축될 때, 비로소 재단은 거대한 창업 생태계의 혁신 플랫폼으로 거듭나게 된다.
경영학에서 말하는 진정한 혁신은 기존 시스템 내부의 효율성을 조금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여 환경 자체를 바꾸는 혁신, 그것이 바로 ‘기업가형 자선’의 본질이다. 지난 60여년간 대한민국을 경제와 문화의 불모지에서 조선, 자동차, 반도체, K-컬쳐 등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했던 창업 세대의 개척자적인 기업가정신은, 이제 공익 생태계에서 기업가형 자선을 통해 현대적으로 계승되어야 한다. 재단이 추구하는 기업가형 자선은 기존의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우리의 K-기업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기업가형 자선가에 의해 완성된다. 그들은 진짜 문제의 원인을 집요하게 분석하고 해결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전통적 자선이 자본주의가 낳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을 끄는 것이라면, 기업가형 자선은 불이 나지 않게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게이츠 재단은 수십년간 수많은 자선단체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아프리카 보건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기업 경영 전략의 루틴인 데이터 기반의 문제 정의-전략 수립-파트너십 기반의 실행-끊임없는 성과 측정을 통해 백신 개발과 의료 인프라 구축, 각 국가의 정책 협력과 인재 육성 등 전방위적인 개입으로 10여년 만에 아프리카 47개국 전지역의 폴리오(Polio virus)를 박멸하는 성과를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기업가형 자선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조직이 기업가형 재단이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재단이라도 단독 플레이로는 한계가 있다. 기업가형 재단은 정부(행정력), 학계(연구 인프라), 기업(비즈니스 자원)을 연결하는 허브(Hub)로서 ‘집합적 임팩트(Collective Impact)’를 창출해야 한다. 또한, 기업가형 재단이 국가정책의 보조자가 아니라 사회변화의 설계자로 성장하여야 한다. 재단의 자본력과 역량을 활용하여 국가와 기업이 해결하기 어려운 중장기적인 사회 난제 해결을 주도해야 한다. 더불어, 대한민국 미래의 사회복지를 책임질 필란트로피(자선)의 영역에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생태계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익재단은 자본주의의 최전선에서 시장이 해결하지 못하는 맹점을 보완하는 최후의 보루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전략적이어야 하고, 더 치열하게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 착한 의도가 결코 무능함을 용서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기업가형 재단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웅적인 개인 리더십에 의존하는 조직이 아니라, ‘리더가 없어도 완벽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시스템’을 완성하는 데 있다. 불안 대신 심리적 안전감을 기반으로 내부 구성원들의 야성을 깨우고, 그들 스스로가 혁신의 주체가 되도록 임파워먼트(Empowerment)하는 조직 문화. 그것이야말로 기업가형 재단이 남겨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자선의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선한 사람’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바꿀 역동적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유능한 시스템 빌더’가 되어야 한다. 관성을 깨고 혁신을 제도화하는 기업가형 재단의 대담한 실험이, 대한민국 공익 생태계의 새로운 문법이 되기를 기대한다.

